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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을미개혁 /아관파천 / 독립협회 / 광무개혁 청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게 되어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전쟁 배상금과 랴오둥반도를 할양받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랴오둥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반환하자 조선 내에서 친러 세력인 명성 황후 등의 세력이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은 명성 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고 을미개혁을 추진하였다. 을미개혁으로 태양력을 사용하게 하였고 연호를 제정해 건양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게 하였다. 군제를 개편해 훈련대와 시위대를 해산하거나 재편했고 중앙에는 친위대 2개를 중대로 하여 설치하고 평양과 전주 등지방에는 진위대를 각 1 대대 설치했다. 또한 우편 사무를 재개했고 소학교령을 제정하여 공포했다. 종두법을 시행했으며 단발령을 공포했다. 하지만 명성 황후의 시해와 단.. 더보기
[한국사] 동학 농민 운동 / 갑오개혁 조선 농촌 경제는 일본의 경제적인 침투로 인하여 파탄에 이르렀다. 일본은 무역을 독점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했고 고리대나 입도선매를 통해 조선 농민들의 가난한 형편을 이용해 곡물을 사들여 폭리를 취했다. 조선에서는 방곡령을 선포하기도 했으나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농민들의 불안과 불만은 커졌고 정치와 사회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사회 지식인들과 농민들 사이에서는 사회 변역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가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동학의 교세가 확장되었다. 동학은 인간 평등사상과 사회 개혁 사상을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점이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와 일치하였다. 동학은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확대하였고 포접제 조직은 대규모 농민 세력과 규합하여 조직적인 농민 전쟁의 형태가 되었다. 동학의 교세가 확.. 더보기
[한국사] 임오군란 / 갑신정변 조선은 미국과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1882년에 맺었다. 미국은 조선 문호 개방을 강제로 시키려 했지만 실패했었다. 조선에서는 러시아 세력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는 내용인 황준현의 '조선책략'이 유포되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과 외교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타나게 되었다.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러시아와 일본 견제를 위해 조선과 미국이 조미 통상 조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알선했다. 조약 내용에는 거중 조정, 치외 법권, 관세 설정, 최혜국 대우 등이 있었다. 조선은 이외에도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와 수교를 했다. 위정척사는 정학과 정도를 지키고 사학과 이단을 멀리한다는 뜻이다. 위정은 성리학고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고 척사란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요나.. 더보기
[한국사]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 / 문호 개방 1863년부터 흥선 대원군의 집권이 시작되었다. 조선은 오랜 시간 세도 정치로 왕권이 약화되어 있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전국 곳곳에서는 농민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철종은 갑작스럽게 죽고 12세의 어린 나이의 고종이 즉위를 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부친으로 이후 정권을 잡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 개혁은 민생안정을 추진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통상수교 거부 정책으로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흥선 대원군 정책의 목적은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이었다. 대내적으로는 전제 왕권을 확립하고 위민 정치에 힘쓰는 것이었고 대외적으로는 통상 수료 거부 정책을 고수했다. 흥선 대원군은 안동 김 씨 가문을 축출했고 당이나 지방색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하.. 더보기
[한국사] 조선시대 사회사 임진왜란 이후에는 사회가 혼란하여 신분제의 동요도 있었다. 정권에서 밀려난 양반들이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향반이 되기도 하였고 향반보다 더욱 몰락한 경우에는 잔반이 되기도 했다. 양반 계층의 도태는 더욱 심해졌고 양반 수는 증가하고 상민과 노비 수는 감소했다. 임진왜란 이후 재정적 타격을 받은 정부가 공명청을 발급하고 납속책을 시행해 서얼과 상민이 이를 이용해 신분상승을 했던 것도 한몫을 하였다. 족보를 사거나 위조하는 것도 성행했다. 이러한 신분 변동으로 인해 양반 중심의 신분체제가 크게 흔들렸다. 중인층은 계속해서 신분 상승을 추구했고 서얼에 대한 차별도 임진왜란 이후 완화되기 시작했다. 영조, 정조 때는 서얼을 등용하기도 하여 서얼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신분상승 운동을 시도했다. 1851년에는 신해허.. 더보기
[한국사] 조선시대 경제사 영조 때는 양역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균역법을 시행했다. 균역법 시행으로 농민들은 1년에 군포를 1 필만 부담하면 되었다. 지주에게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 결당 미곡 2두를 부담시켜 균역법 시행으로 감소한 재정을 채웠다. 선무군관포로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주어 군포 1 필을 납부하게 했다. 또한 어장세와 선박세 등의 잡세 수입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충했다. 하지만 균역법의 시행에도 토지에 부과되는 결작의 부담이 소작 농민에게 돌아갔으며 군정 문란이 다시 심해졌다. 조선시대에는 농업 생산력 증대에 힘썼다. 정부는 개간 사업을 장려해 황폐한 농토를 개간하고자 했다. 하지만 재력이 있는 양반 관료나 토호에게만 유리해 농민들은 오히려 소유지를 잃어가거나 감축당했다. 현종 때는 제언사를 설치하고 정.. 더보기
[한국사] 조선시대 세도정치와 경제사 조선시대에는 세도 정치가 전개되었다. 왕의 외척인 안동 김 씨, 풍양 조 씨 등이 순조, 현종, 철종 3대에 걸쳐 60년간 정권을 잡은 시기이다. 세도 정치는 종래의 일당 전제를 거부했으며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했다. 한 가문은 사익을 위해 정국을 운영했고 이 시기에는 정권의 사회적인 기반이 결여되었다. 순조가 집권하던 시기에는 정순 왕후의 수렴청정이 있었다. 순조가 11세 어린 나이에 즉위해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 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 시기에 정조 때 정권에서 배제되었었던 노론 벽파 세력이 정국을 주도했다. 이들은 천주교 탄압인 신유박해를 이용해 정조가 규장각을 통해 양성했던 인물들을 몰아냈다. 이후 정순 왕후가 죽고 노론 벽파 세력이 약해지자 순조의 장인이었던 김조순을 중심으로 안.. 더보기
[한국사] 조선시대 정치사 조선시대에는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는데 초기에는 동인이 더 우세했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과 건저의 사건을 계기로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남인의 힘이 더 강했지만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는 북인의 힘이 강해져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광해군은 중립 외교정책을 펼쳤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면서 전쟁이 끝난 이후 복구 사업에 힘썼다. 북인은 광해군의 지지 세력이었는데 북인은 당시 정권을 독점하려 서인과 남인 등을 베재하였다. 광해군 때는 인조반정이 일어났는데 영창 대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 대비의 아들이라서 광해군에게 위험이 되는 존재였다. 왕실 직통이 아니었던 광해군은 자신의 불안정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영창대군을 살해하였고 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