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에는 세도 정치가 전개되었다. 왕의 외척인 안동 김 씨, 풍양 조 씨 등이 순조, 현종, 철종 3대에 걸쳐 60년간 정권을 잡은 시기이다. 세도 정치는 종래의 일당 전제를 거부했으며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했다. 한 가문은 사익을 위해 정국을 운영했고 이 시기에는 정권의 사회적인 기반이 결여되었다.
순조가 집권하던 시기에는 정순 왕후의 수렴청정이 있었다. 순조가 11세 어린 나이에 즉위해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 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 시기에 정조 때 정권에서 배제되었었던 노론 벽파 세력이 정국을 주도했다. 이들은 천주교 탄압인 신유박해를 이용해 정조가 규장각을 통해 양성했던 인물들을 몰아냈다. 이후 정순 왕후가 죽고 노론 벽파 세력이 약해지자 순조의 장인이었던 김조순을 중심으로 안동 김 씨는 정권을 잡고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순조는 국정을 주도해 나가려고 노력했지만 지지세력을 찾지 못해 국정 주도에 실패했다. 순조 말년에는 효명 세자가 대리청정을 했는데 이를 통해 효명 세자는 세도가들을 견제하고 새로운 권력 집단을 만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현종 때는 외척인 조만영과 조인영 등이 중심이 되어 풍양 조 씨 가문이 권력을 잡았고 철종 집권기에는 안동 김 씨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잡아 세도 정치가 계속되었다. 세도 정치 시기에는 정치 집단 사이 대립구조가 사라지고 정치 기반이 축소되었다. 유력 가문은 서로 연합하거나 대립하면서 인척 관계를 맺어 하나의 정치 집단을 이루어 권력과 이권을 독점해 나갔다. 고위직은 정 2품 이상만이 정치적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그 아래 관리들은 정치적 기능은 거의 잃은 채 행정 실무만을 맡게 되었다. 의정부와 6조는 기능을 상실했고 실질적인 힘이 비변사로 집중되었다. 유력한 가문 출신 인물들은 비변사의 실질적 역할 담당 자리를 차지했고 권한을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데 이용했다. 왕권이 약화되었고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각했다. 상품 화폐 경제 발전이 저하되었고 지방 수령의 자리를 상품화해 파는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삼정의 문란이 심해서 이후 순조 때 홍경래의 난, 철종 때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전세 수취 제도인 전정과 군포 징수제도인 군정, 구휼제도인 환곡의 문란이 매우 심했다. 수령과 향리의 지위는 강화되어 이들의 부정을 견제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 자연재해가 계속되어 기근과 질병으로 인구가 급속히 감소해 농민 생활이 어려웠으며 수탈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 증가했다.
병자호란이 끝난 이후에 조선은 청과 사대관계를 맺고 교역을 활발하게 했다. 하지만 청에 대한 적개심이 오랜 기간 남아있었기 때문에 북벌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청나라의 힘이 강해지면서 청나라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우리에게 이로운 것은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북학론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청나라와는 국경 문제를 둘러싼 백두산정계비와 간도 귀속 문제가 있었다. 백두산정계비는 1712년 건립되었는데 조선과 청나라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정리하여 정계비를 세운 것이다.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고 백두산정계비에 적혀있다. 19세기가 되어 토문강의 위치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로 귀속문제가 대두되었다. 간도는 우리나라가 외교권을 상실한 상황에 청나라와 일본 사이 간도 협약으로 체결이 되어 간도가 청나라 귀속되고 말았다.
조선은 일본과는 1609년에 기유약조를 맺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일본과 외교 관계를 끊었다. 이에 일본은 다시 조선에게 국교 재개 요청을 했고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어 부산포에 왜관을 설치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섭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본은 자신들의 권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쇼군이 바뀔 때마다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했다. 통신사는 조선의 선진 학문과 기술,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였다. 일본과는 울릉도와 독도 문제가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였지만 일본 어민들이 자주 이곳에 침범했다. 숙종 때는 안용복이 울릉도에 출몰하는 어민들을 쫓아내고 일본으로 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나라 영토임을 확인받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후에도 일본의 계속된 침범에 19세기말 조선 정부에서 울릉도에 군을 설치해 관리를 파견해 독도까지 관할하도록 했다. 프랑스의 '조선왕국전도'와 일본에서 편찬된 '은주시청합기'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이 명시되어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피해로 농촌 사회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국가에서는 수취제도를 개편해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인조 때는 영정법을 시행했다. 정부는 풍년이건 흉년이건 관계없이 전세를 토지 1 결당 미곡 4두로 정해서 받았다. 전세 비율이 이전보다 낮아졌고 다수의 농민들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광해군 때는 경기도에 처음 집집마다 토산물을 징수했던 공물 납부 방식을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대동법을 처음 시행하였다. 인조 때는 이원익의 주장으로 강원도에 실시하였고 효종 때는 충청도와 전라도 연읍, 현종 때는 전라도 산간 지역에 실시되었다. 이후 숙종 때는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했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대동법을 시행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던 이유는 양반 지주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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