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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리의 한국사 공부

[한국사]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 / 문호 개방

 

1863년부터 흥선 대원군의 집권이 시작되었다. 조선은 오랜 시간 세도 정치로 왕권이 약화되어 있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전국 곳곳에서는 농민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철종은 갑작스럽게 죽고 12세의 어린 나이의 고종이 즉위를 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부친으로 이후 정권을 잡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 개혁은 민생안정을 추진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통상수교 거부 정책으로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흥선 대원군 정책의 목적은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이었다. 대내적으로는 전제 왕권을 확립하고 위민 정치에 힘쓰는 것이었고 대외적으로는 통상 수료 거부 정책을 고수했다. 흥선 대원군은 안동 김 씨 가문을 축출했고 당이나 지방색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하였다. 세도 가문이 장학하던 비변사를 축소하거나 혁파했고 의정부 기능을 다시 강화시켰다. 또한 군사 부분에서는 삼군부의 기능을 부활시켰다. 법치 질서 정비를 위해 법전인 '대전회통'을 편찬했으며 행정 사례집은 '육전조례'를 편찬했다. 서원 소유 토지와 노비를 확보와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서원을 통해 지방 유생들의 농민 수탈을 막기 위해 만동묘를 철폐하고 사액 서원 600여 개 정도를 철폐했다. 이로 인해 유생들이 분개해 맹렬한 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흥선 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해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회복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양반들의 묘지림을 벌목했고 강제로 원납전을 징수하도록 했다. 고액 화폐인 당백전을 발행했는데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도 했다. 토지에는 세금을 부과했으며 4대 문 통행세를 신설했다. 경복궁 중건 공사에는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백성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또한 전정을 개혁해 왕실의 면세 전을 국가에 반납했고 양전 사업을 실시했다. 양전 사업으로 세금을 내지 않았던 땅을 찾아내고 관리나 토착 세력의 불법 행위를 엄하게 징벌했다. 군역 제도를 개혁해 평민뿐만 아니라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동포법을 실시했다. 동포법은 이후에 호포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군역 의무 이행자를 확대해 국가 재정을 확충했고 매 호당 2냥씩 동포 전을 징수했다. 이전에 국가에서 운영하던 환곡 제도를 폐지하고 사창제를 실시해 향촌민들이 면 단위로 사창의 운영 책임자를 뽑아 사창을 스스로 운영하도록 했다. 

 

흥선 대원군의 동상 수교 거부 정책은 척화비로 상징된다. 전국 주요 지역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강화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톈진에 체류 중이던 미국인이 제너럴셔먼호를 대동강 유역에 몰고 와 수심을 측량하고 약탈과 살육을 자행한 것이 발단이었다. 평안도 관찰사였던 박규수가 제너럴셔먼호를 불사 질렀고 선원들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1866년 9월에는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그해 1월에 일어났던 병인박해를 구실로 천주교를 구실로 프랑스 로즈 제독이 프랑스 신부 리델과 강화 읍성을 점령하고 통상을 강요했다. 흥선 대원군은 순무영을 설치했고 양현수는 문수산성과 정촉산성에서 프랑스군에게 항전했다. 조선군의 항전에 프랑스군은 퇴각하였는데 퇴각하는 과정에서 외규장각을 방화했고 다수의 서적을 약탈해 갔는데 이때의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한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미국인 젠킨스와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프랑스 선교사 페론과 함께 충남 예산국 덕산면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는 만행을 저지른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서구 열강에 대한 민중의 증오가 증폭되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미국이 강화도로 침공해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어재연 장군이 광성보 전투에서 분전했으나 패했다. 신미양요 이후에는 강화도 수비 강화를 위해서 심도포량미가 신설되었다. 

최익현의 계유 상소로 흥선 대원군은 실각했다. 그리하여 1873년부터는 고종이 친정을 실시하게 되었다. 

 

고종이 친정을 하면서 명성 황후 중심의 민 씨 일족이 대두했다. 조선에서는 개항 반대론이 우세했지만 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통상 개화론자들에는 박규수, 오정석, 유흥기, 이동인, 이규경 등이 있었다. 통상 개화론자들은 열강의 군사적 침략을 피하기 위해 개항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흥선 대원군의 하야로 통상 개화론자들이 성장하게 되었고 문호 개방의 바탕이 마련되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에 일본은 근대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자본주의화를 서둘렀다. 일본은 이 과정에서 조선의 문호 개방을 강요하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어 문호를 처음으로 개방하게 되었다. 강화도 조약은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다. 하지만 조선에게 불리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일본은 청의 종주권을 부인해 조선을 자주국으로 규정했다. 그리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일본은 부산, 원산, 인천항을 개항시켜 조선에 대한 침략을 용이하게 만들었고 치외 법권 조항을 설정해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불법 행위에 대해 조선에서는 처벌할 수 없도록 했다. 이와 더불어 해안 측량권 등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항들을 조약 내용에 넣었다. 

조일 무역 규칙을 제정했는데 여기에는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관세와 항 세를 받지 않고, 개항장에서 쌀과 잡곡의 무제한 수출을 허용하도록 했다. 조일 무역 규칙을 조일 통상 장정으로 개정하며 관세가 설정되었고 이후에 조미 수호 통상 조약으로 일본에 대해서도 최혜국 대우가 추가되었다. 방곡령 선포가 규정되기도 했지만 시행 1개월 전에는 반드시 지방관이 일본 영사관에 알려야 한다는 조항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