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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리의 한국사 공부

[한국사] 조선시대 사회사

 

임진왜란 이후에는 사회가 혼란하여 신분제의 동요도 있었다. 정권에서 밀려난 양반들이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향반이 되기도 하였고 향반보다 더욱 몰락한 경우에는 잔반이 되기도 했다. 양반 계층의 도태는 더욱 심해졌고 양반 수는 증가하고 상민과 노비 수는 감소했다. 임진왜란 이후 재정적 타격을 받은 정부가 공명청을 발급하고 납속책을 시행해 서얼과 상민이 이를 이용해 신분상승을 했던 것도 한몫을 하였다. 족보를 사거나 위조하는 것도 성행했다. 이러한 신분 변동으로 인해 양반 중심의 신분체제가 크게 흔들렸다. 중인층은 계속해서 신분 상승을 추구했고 서얼에 대한 차별도 임진왜란 이후 완화되기 시작했다. 영조, 정조 때는 서얼을 등용하기도 하여 서얼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신분상승 운동을 시도했다. 1851년에는 신해허통으로 서얼들의 관직 진출이 가능해졌다. 중인들은 신분상승에 실패했다. 서얼의 신분 상승 운동으로 기술직 중인들도 신분상승을 시도해 대규모 소청 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노비들은 군공과 납속으로 신분상승했다. 국가에서는 다수의 공노비를 종래의 입역 노비에서 납공 노비로 전환하였다. 신분 상승에 실패한 노비들은 도망 노비가 되었고 임노동자, 머슴, 행상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도망노비로 인해 잔존 노비는 신공의 부담이 증가되었다. 도망 노비가 확산되자 나라에서는 신공을 줄여 주기도 하고 도망노비를 잡으려고도 하였지만 실패했다. 이후 노비종모법이 시행되어 아버지가 노비라 하더라고 어머니가 양민이면 양민의 신분이 되는 신분 상승이 이루어졌고 공노비도 순조 때 해방시키기도 하였다. 갑오개혁 이후에는 신분제가 폐지되어 노비제가 종말 되었다. 

 

농촌 사회의 분화와 신분제의 붕괴로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도 변화하였다. 양반의 명단인 청금록과 향안으로 신분을 확일 할 수 있었고 이는 향약 등 향촌 자치 기구에서 주도권을 가지기 위해 중요한 서류가 되었다. 양반들은 족적 결합을 강화해 자신들의 지위를 지켜 나가고자 하였고 이로 인하여 전국에는 많은 동족 마을이 만들어졌고 문중을 중심으로 서원과 사우가 세워졌다. 향전으로 인해 사족의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수령과 향리의 권한이 강화되어 탐관오리가 생겨났다. 향회는 주로 수령이 세금을 부과할 때 의견을 물어보는 자문 기구로 위상이 낮아졌다. 향촌 사회에는 수령이 깊숙이 침투해 지배영역을 넓혀갔다. 향촌 사회에서는 기존의 양반이 아니라 새로운 부농층이 등장해서 영향력을 펼쳤다. 정부는 경제적 능력은 있지만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없던 부농층들에게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납속이나 향직의 매매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정부는 재정 위기 극복을 위해 부농층을 적극 활용하였고 향임 직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향촌 지배에 참여하지 못한 부농층도 여전히 많았다는 한계가 있었다. 

농민층에는 중소 지주층과 자영농이 있었다. 대다수의 농민은 작은 규모를 소유한 자영농이었고 다른 사람의 땅을 빌려 경작하고 소작료를 내는 소작농도 있었다. 농민들은 수취의 증가로 생활이 곤궁해졌다. 그들은 거주 이주의 제한이 있었고 자급자족 생활을 했으나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지주 대부분이 양반이었고 상품 화폐 경제 발달과 양반 지주 이윤 추구로 광작을 하는 대지주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지주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공명첩이나 족보를 사 신분을 상승하기도 하였고 더 나아가 향촌 사회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워나가고자 했다. 일부 농민은 부농층으로 성장했지만 다수의 농민들은 토지에서 밀려나 임노동자가 되었다.

 

천주교는 17세기 이후 베이징에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에 의하여 서학으로 처음 들어왔다. 18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졌고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이 천주실의를 읽고 신앙생활을 주로 하였다. 점차 천주교가 확대되고 천주교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자 국가에서는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제한하였다. 순조 때는 노론 강경파인 벽파가 집권하게 되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인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 실학자 및 많은 양반 계층이 천주교를 떠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조선 교구를 설립하고 서양인 신부들이 몰래 조선에 들어와 포교를 하면서 점점 천주교가 확대되었다. 

 

동학은 1860년에 경주의 몰락한 양반 최제우가 만들었다. 유, 불, 선의 주요 내용이 바탕이 되었으며 주문과 부적 등과 같은 민간 신앙 요소들과도 결합이 되었다. 천주교 교리도 일부 흡수한 교리였다. 동학에서는 사회 모순 극복과 일본과 서양 국가의 침략을 막아내자고 주장을 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시천주와 인내천을 강조한 동학은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지 않았고 노비제도를 없애며 여성과 어린이의 인권을 존중했다.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에서는 신분 질서를 부정하는 동학을 위험하게 여겨 최제우를 처형했다. 최제우의 뒤를 이은 최시우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만들어 교리를 정리했고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경기도 등으로 교세를 확대해 나갔다.

 

삼정의 문란으로 수령의 부정이 극에 달했다. 사회 불안이 고조되었고 가난과 세금을 감당할 수 없었던 농민들은 유민이 되거나 화전민이 되었고 도적이 되는 농민들도 있었다. 농민들은 소청이나 벽서, 괘서 등으로 대응하였는데 점차 농민 봉기로 변화하여 적극적으로 항거하기 시작했다. 농민들의 항거 중 가장 큰 규모는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과 단성에서 부서 진주까지 전국으로 확산된 임술 농민 봉기가 있었다. 홍경래의 난은 세도 정치의 폐해와 평안도에 대한 지역 차별로 일어나게 되었다. 청천강 이북 지역까지 거의 장악했으나 5개월 만에 평정되고 말았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농민 봉기가 계속해서 일어났지만 관리들의 부정과 탐학이 잠재워지지 않았다. 진주 농민 봉기와 임술 농민 봉기는 1862년 일어났다. 진주 농민 봉기는 경상도 우병사 백낙신의 탐학이 봉기의 원인이었고 몰락 양반 유계춘을 중심으로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임술 농민 봉기는 농민의 항거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봉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