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에는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는데 초기에는 동인이 더 우세했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과 건저의 사건을 계기로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남인의 힘이 더 강했지만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는 북인의 힘이 강해져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광해군은 중립 외교정책을 펼쳤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면서 전쟁이 끝난 이후 복구 사업에 힘썼다. 북인은 광해군의 지지 세력이었는데 북인은 당시 정권을 독점하려 서인과 남인 등을 베재하였다. 광해군 때는 인조반정이 일어났는데 영창 대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 대비의 아들이라서 광해군에게 위험이 되는 존재였다. 왕실 직통이 아니었던 광해군은 자신의 불안정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영창대군을 살해하였고 인목 대비를 유패하였는데 이를 폐모살제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광해군은 도덕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다. 또한 무리한 토목 공사로 국가 재정이 악화되어 민심이 돌아섰고 결국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던 북인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반정을 주도한 서인이 남인 일부와 연합해 정국을 운영해 나가며 붕당 정치가 더욱 진전되었다. 서인과 남인은 기본적으로 서로의 학문정 입정을 인정하였고 서로 비판적인 공존 체제를 이루었다. 현종이 즉위할 때까지는 서인이 주도권을 잡고 남인이 공존하는 구도로 붕당 정치가 전개 되었다. 현종 때 예송 논쟁이 일어났다. 예송은 효종이 죽었을 때 효종의 왕위 계승논란으로 전통성 관련하여 서인과 남인 사이의 대립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1차 예송 논쟁은 기해예송으로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1년 상복을 입게 되었다. 2차에서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서 1년 설이 채택되었다. 이후 남인의 우세 속에서 서인이 공존하는 상태로였는데 서인이 이후 경신환국으로 남인을 몰아내 다시 정세를 주도했다. 경신환국으로는 서인이 남인과 소론으로 나뉘는 계기가 되었다.
붕당정치는 점점 하나의 당이 주도권 전체를 잡는 일당 전제화의 주세로 변질되었다. 서인은 정책 수립과 다른 붕당의 탄압 과정에서 갈등이 깊어져 노장 세력과 신진 세력인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노론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대의명분과 민생 안정을 중시했고 소론은 윤증을 중심으로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 개척을 주장했다. 남인이 정국 주도권 싸움에서 밀려난 뒤에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으로 정국 반전이 계속되었다. 경신환국은 숙종 때 허적의 유악 사건과 허견의 역모 사건으로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집권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기사환국은 숙종 때 일어났는데 후궁 장 씨인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정할지 말지를 문제로 서인이 당시 축출되고 후궁 장 씨 세력이었던 남인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일이었다. 갑술환국은 이후 숙종 20년 때 일어났는데 폐비 민 씨인 인현 왕후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 세력이 권력을 잃고 소론과 노론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희빈 장 씨를 이후 인현 왕후를 무고한 사건으로 죽임을 당했다.
영조와 정조 때는 붕당정치를 바로잡기 위한 탕평론이 대두되었다. 정치 집단 간 세력 균형이 무너져 왕권 자체도 불안정하게 되어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국왕이 정치 중심에 서서 바로잡는 탕평론이 대두된 것이었다. 임금이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를 탕평이라고 한다. 숙종이 처음 정치적 균형을 재정립할 목적으로 탕평론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는 명목상의 탕평론에 지나지 않아 오히려 환국이 일어나는 빌미를 주고 말았다. 이후 영조 때 탕평책이 실시되었다. 영조는 탕평교서를 발표했는데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였다. 하지만 노론과 소론이 번갈아가며 등용해 정국이 혼란스러웠고 영조의 종통성을 부정하고 탕평책에 반대하는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붕당 간 관계를 다시 조정해 나갔다. 산림의 존재를 부정했는데 붕당 뿌리 제거를 위해 비선실세와도 같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기 않고 붕당의 아지트였던 서원을 대폭 정리했다. 또한 이조전랑의 정원을 축소해 통청권을 폐지했다. 영조는 완론탕평을 실시했다. 영조는 연산군 때 폐지되었던 신문고를 부활시켰다. 사형수에 대한 재판을 세 번까지 하게 하는 삼 심제를 시행했고 가혹한 형벌을 폐지했다. 균역의 문제 해결을 위해 균역법을 시행했고 청계천을 준설하고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를 편찬했다. 탕평비를 건립하고 속대전을 편찬했다.
정조는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명백하게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인 준론 탕평을 펼쳤다. 왕실의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해 비서실의 기능과 문한 기능을 통합적으로 부여했다. 신진 인물이나 중, 하급 관리 중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기도 했다. 국왕의 친위 부대인 정용영을 설치해 군사적 기반을 마련했다. 서울 주변의 4 유수부가 서울을 엄호하는 유수부 체제를 완성했고 수원 화성을 건설했다. 화성을 세워 정치적, 군사적 기능을 부여해 정조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도시로 육성하고자 했다. 수령의 권한을 강화해 수령이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할 수 있었고 백성에 대한 통치력도 강화할 수 있었다. 지방관 권한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조는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을 완화했고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허락하는 통공 정책을 실시했다.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대전통편을 편찬했고 신해박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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