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리의 한국사 공부

[한국사] 고구려/백제/신라 왕의 업적

소소리95 2023. 12. 31. 01:46

 

고구려는 부여 유이민과 압록강 유역의 토착 세력이 연합하여 만들어졌다. 동명왕이 고구려의 1대 왕이 되었으며 2세기 6대 왕인 태조왕 때가 되어 고구려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태조왕은 중앙 집권 국가로 체제를 정비하였고 계루부가 독점하여 계루부에서 왕위를 독점으로 세습하기 시작했다.

고국천왕은 행정적 5부를 만들었다. 이전에는 부족적 전통을 지녀온 5부였는데 이를 수도와 그 주변 행정 지역 단위를 의미하는 5부로 개편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전에 왕위계승이 형제 상속이었던 것을 부자 상속으로 바꾸었다. 고국천왕 때 진대법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빈민을 구휼하는 제도이다.

11대 동천왕은 서안평을 습격하였지만 점령은 하지 못하였다. 관구검이 쳐들어와 환도성을 함락당하고 동천왕은 옥저로 도망을 가게 된다. 15대 미천왕 때가 되어서 서안평을 점령하고 대방군과 낙랑군을 밀어내고 대동강 유역을 확보하게 된다. 

고국원왕 때 전연(모용황)의 침입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수도를 함락당하게 된다. 고국원왕은 백제 근초고왕에게 평양성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고구려는 17대 소수림왕 때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를 완성하게 된다. 소수림왕은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을 설립했으며 율령을 반포하였다. 이후로 고구려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광개토대왕은 요동과 만주 지역을 확보하고 한강 이북까지 진출하여 고구려의 땅을 넓혀갔다.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기병 5만 명을 보내 왜군을 격퇴한 일도 있었다. 이후에 고구려는 신라를 속국으로 대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광개토대왕은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는 중국과 대등함을 나타내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중국에 있는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에는 후연과 거란을 복속하고 고구려 땅을 넓혀간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 내용을 담고 있다. 장수왕은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장수왕은 남하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백제의 비유왕과 신라 눌지왕이 나제동맹을 체결하는 계기가 된다. 장수왕은 개로왕을 살해하고 한성을 함락했으며 남양만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중국 남북조와 동시에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영양왕은 수를 선제 공격하였고 이후 수나라는 4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살수대첩이 이때 일어난 것이었으며 을지문덕이 활약하였다.

영류왕은 당의 압박을 받았고 연개소문의 의견에 따라 부여성부터 비사성까지 천리장성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천리장성은 이후 보장왕 때 완성되었다. 당나라는 영류왕을 죽인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로 고구려를 쳐들어왔는데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로 당나라가 패하였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죽음 이후 자식들의 권력 투쟁과 나당연합군의 평양성 공격으로 인해 고구려가 멸망하게 된다.

 

백제는 온조왕이 세웠는데 고구려와 부여 계통임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몇 가지 있다. 고구려 초기의 돌무지무덤과 비슷한 무덤이 서울시 석촌동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5부제 행정제도가 비슷하고 백제에서도 시조를 동명왕으로 생각한다. 백제 왕족의 성씨 또한 부여씨이다.

8대 왕인 고이왕 때 백제의 국가기틀을 마련하였다. 형제상속을 하였으며 율령을 반포하였다. 6 좌평 16 관 품을 설치하고 자, 비, 청으로 관리 복색을 제정하였다. 근초고왕 때 백제는 최고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부자상속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고흥이 '서기'를 편찬하였다. 근초고왕은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살해하였고 황해도에 진출하였으며 마한을 통합하였다. 가야에도 지배권을 행사하였으며 요서지방, 산둥반도, 일본 규슈까지 진출을 하였다. 중국 동진과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칠지도를 백제 왕이 일본 왕에게 주어 이를 통해 백제와 왜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아직기는 한자를,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으로 전파하였다. 

백제는 침류왕 때 불교전래가 되었다. 비유왕은 신라의 눌지 마립간과 나제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장수왕을 견제하였다. 개로왕은 장수왕의 압박을 받았으며 수도인 한성이 함락되었고 개로왕은 결국 처형당하게 된다. 

이후부터 웅진 백제의 시대가 시작된다. 문주왕은 웅진(공주)으로 천도를 하였다. 동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강화했으며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무령왕은 중앙 집권력을 강화했다. 지방세력 통제를 위해 22 담로에 왕자와 왕족을 파견했고 남조의 양과 교류를 하였다. 이는 무령왕릉(벽돌무덤) 양식이 중국의 무덤양식과 비슷하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가야 지역까지 진출을 하게 되었다.

성왕은 사비(부여)로 한번 더 수도를 옮기고 남부여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진흥왕과 연합하여 한강하류지역을 일시적으로 차지하였는데 이 지역을 신라에 빼앗기게 된다. 이로 인하여 나제 동맹이 깨지게 된다.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고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은 전사하게 된다. 

무왕은 미륵사와 왕흥사를 건립하였다. 익산으로 천도를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만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하기도 하지만 나당연합에 의하여 결국 백제는 멸망하게 된다. 

 

신라는 내물 마립간 때 국가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김 씨가 왕위를 세습하고 광개토대왕의 도움으로 왜군을 축출해 낸다. 호우명 그릇은 고구려와 신라의 교섭이 활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눌지 마립간은 나제 동맹을 체결하고 왕위 부자 상속을 한다. 이후 지증왕 때 국고를 신라로 하고 더 이상 마립간이 아닌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소를 사용해 농사를 짓는 우경을 시작하였고 순장을 금지하여 노동력을 확보하였다. 상복법과 동시전을 설치하고 이사부를 통해 우산국을 복속하였다. 법흥왕 때는 왕권을 강화하고 율령을 반포하였다. 병부를 설치하여 군사권을 확보하였고 백관의 공복을 자, 비, 청, 황으로 제정하였다. 17 관등을 설치하여 6두품은 6 관등 아찬까지만 승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상대등을 설치하고 금관가야를 병합하였다.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후 진흥왕 때 신라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진흥왕은 화랑을 국가 조직으로 개편하고 황룡사 사찰을 건립하였다. 진흥왕 때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가야를 정복하게 된다. 한강 상류를 정복하고 단양 적성비를 세우고 한강 하류를 점령하고 북한산 순수비를 세웠다. 대가야를 정벌하고는 창녕비를 세웠으며 함흥평야에는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를 세웠다. 거칠부는 '국사'를 썼다. 신라는 당항성을 통해 중국과 직접 교류하였으며 고구려 승려 혜랑을 승통으로 삼아 불교 교단을 정비하였다. 

진평왕은 남산 신성비를 세웠으며 숭불 정책, 세속 5계를 중요시하였다. 원광은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는 것에 대한 글인 걸사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선덕여왕은 의자왕으로 인해 대야성이 공격당했으며 비담과 염종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황룡사 9층 목탑과 첨성대를 만들었다. 진덕여왕은 성골계 마지막 왕이다.

이후 통일신라로 이어지게 된다.